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엄 미사 (문단 편집) === 초연과 출판 === 19세기의 베토벤 연구가 노테봄(Martin Gustav Nottebohm, 1817∼1882)이 쓴 베토벤 전기에 따르면 1820년경에 키리에, 글로리아, 크레도가 이미 완성되었고, 2년 후인 1822년에 상투스/베네딕투스와 아뉴스 데이가 마저 완성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단 완성된 후에도 1년여에 걸쳐 계속 수정과 개작을 거듭한 끝에 1823년에 최종 완성본을 탈고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초연은 1년 뒤에 이루어졌고 실질적인 전곡 초연은 베토벤 사후인 1830년에야 이루어졌다. 이 작품의 최초의 완성된 악보 사본이 1823년 3월 19일에 루돌프 대공에게 전달되었고 1년 뒤인 1824년 4월 7일에 러시아 공작 니콜라이 갈치니(Nikolai Borisovich Galitzine)의[* 갈치니공은 당시 또 한 명의 베토벤의 후원자였다.] 차르 황실 방문 기념식을 위해 [[러시아 제국]]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전곡의 초연이 이루어졌다. 다만 이 초연은 대중이 아니라 [[고관대작]]들을 위한 연주였으며 미사곡이 아니라 [[오라토리오]]로 소개되었는데, 베토벤은 이 장르 파괴 소식을 듣고도 딱히 화를 내지는 않았다고 한다. 대중들에게 이 작품이 처음으로 소개된 것은 초연된 지 1달 뒤인 5월 7일로, [[교향곡 제9번(베토벤)|합창 교향곡]]의 초연 무대에서 1부 연주곡으로 이 장엄 미사 가운데 자비송과 신앙 고백, 하느님의 어린양 세 개 악장을 발췌해 공연하였다. 이런 발췌 공연은 일종의 고육책이었는데, 당시 미사곡은 대중 음악회에서 그대로 연주할 수 없다는 검열 당국의 규정 때문이었다. 실제로 당시 프로그램을 보면 이들 발췌 악장은 '독창과 합창이 수반된 세 곡의 대규모 찬송가'라고 개명되어 인쇄되어 있다. 베토벤은 교향곡 9번과 마찬가지로 이 곡을 여러 음악 출판사에 중복 계약해 인세 수입을 몇 배로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의외로 어느 출판사도 이 계약을 반기지 않았고 이 과정에서 오랜 지인들과도 사이가 틀어지는 등 인간관계 면에서 심한 타격을 입기도 했다. 결국 이 장엄 미사는 베토벤 생전에는 출판되지 못했고 그가 사망한 지 1달이 지난 1827년 4월에서야 비로소 비인의 쇼트사에서 출판되었다. 이 과정에서 베토벤이 이 곡을 '오직 가톨릭 전례를 위해' 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자신이 교섭한 출판사들 중 짐로크 출판사에는 [[라틴어]]로 된 미사 통상문에 의거한 원본 외에 [[독일어]]로 번역한 가사를 사용한 판본을 출판해도 된다고 편지에 쓰기도 했다.[* 다만 이런저런 문제 때문에 결국 출판 계약 자체는 성사되지 못했다.] 당시 가톨릭교회들에서는 오직 [[트리엔트 미사|라틴어로만 미사를 봉헌]]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어판을 만들었다는 것은 곧 성직자와 평신도들의 모국어로 예배를 집전하는 [[개신교]] 종단에도 이 곡의 사용을 허락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일화는 전례에 얽매이지 않는 베토벤의 신앙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